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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요 근래 윤동주의 고유한 특성으로 알려져 있는 ‘내면 성찰’이 실은 상호주관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음을 밝히고 그에 이어서 윤동주 시들 자체가 상호텍스트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을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윤동주 시의 상호 텍스트성은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공존과 교섭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윤동주는 기독교인이었고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윤동주의 지적·문학적 사유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갈구와 개인주의적 윤리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잘 살펴보면 동양의 문헌이나 경험으로부터 온 사실들이 그의 서양적 사유에 겹쳐져 있다는 것이 흔히 발견된다. 그들은 병존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교섭을 통해 독특한 문학적 형상을 빚어낸다. 그 모색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서양적인 문화에 지배적인 성격을 투사하고 동양적인 것에 조선인의 경험을 싣는 방식이다. 조선인의 역사적 고난을 문화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서양적 문화형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둘째, 동양적 덕목을 서양적 윤리로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이때 동양적 덕목의 핵심 사항이 서양적 윤리의 특정 항목으로 ‘변위’되는 일이 일어난다. 가령 「서시」의 핵심 구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塊於天)’에서 빌어온 것이 최근 밝혀진 바 있다. 그런데 그는 동양적 덕목의 ‘보편성’을 개인 윤리의 ‘철저성’으로 변위시킴으로써 근대적 태도의 하나의 극점을 가리키는 데 활용하였다. 이 변위를 가능케 한 것은 ‘보편성’과 ‘철저성’이라는 두 태도가 공유하고 있는 ‘남김없이 빠짐없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성질’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윤동주는 동양적 사유를 서양적 문화형에 맞도록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을 중첩시킴으로써 제 3의 문화형 혹은 윤리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이때 동양적인 것은 서양적인 것의 결함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완미함을 미루는 대신, 동양적인 것의 존재만을 남긴다. 즉 서양적인 것의 대안으로서 가정된 특정한 동양적 내용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이것은 바로 일제의 근대 초극의 논리와 대동아 공영권의 구상이 빠졌던 환상이다), 서양적인 것의 결함을 넘어설 수 있는 비서양적 존재만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간」에서 토끼가 보여준 자세이다. 아쉽게도 이 세 번째 방식이 실제로 성취한 제 3의 문화형 혹은 윤리는 윤동주의 시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요절이 정말 안타까운 또 하나의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