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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인직의 「혈의 누」에서 친일과 근대지향이 연결되는 지점을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기존의 논의에서는 청일전쟁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인 친일배청(親日排淸)의 의식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이 글은 친일배청의 태도를 낳는 진정한 이유는 만국공법에 있으며, 이것의 준수 여부에 따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인직이 강조한 것은 일본과 청이라는 개별 국가에 대한 지지 여부가 아니라, 만국공법을 따르는 세계와 따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구분이었다. 그동안 옥련이가 청군이 아닌 일본군의 총알을 맞은 장면은 텍스트의 균열 정도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만국공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청이 만국공법을 어기고 총알에 독을 묻힌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혈의 누」에서 청이 만국공법과 무관한 존재로 그려진 것은 임오군란을 빌미로 1882년 8월 조선과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 후, 조공체제 형식에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미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부인한 것과 관련된다. 이에 맞서 조선정부는 만국공법을 이용하여 장정체제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보자면, 청의 만국공법에 대한 무지 내지는 오용이야말로 일본과 대비되는 가장 부정적인 모습으로서 반청의 주요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창작되던 20세기 초에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 역시 만국공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나갔다. 「혈의 누」에는 을사조약 당시 일본이 내세운 보호국론을 체화한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만국공법과 관련하여 일본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인직은 결코 만국공법이 지닌 근원적인 한계, 즉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라는 측면까지 인식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혈의 누」에서 미국이라는 공간이 유토피아로 형상화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미국이 이상적으로 형상화되는 이유 역시 만국공법과 맥락이 닿아 있다. 옥련과 구완서가 미국과 접촉하는 입구에는 중국인 캉유웨이(康有爲)가 존재하는데, 그는 『실리공법전서(實理公法全書)』를 통해 만국공법을 자연적 이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인류의 평등과 자주권을 주장하였던 사상가다. 이러한 캉유웨이가 힘을 지니고 활동하는 미국이라는 공간은 자연스럽게 만국공법의 진정한 모범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이인직의 「혈의 누」는 친일소설 이전에 만국공법으로 상징되는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지향을 보여준 작품으로 새롭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